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트라팔가르 해전 (문단 편집) == 배경 == 이미 유럽 대륙을 거의 제패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마지막 장애물 영국을 박살내고자 했다. 1803년 영국은 바로 전 해 체결된 아미앵 화약을 파기하고 프랑스에게 선전포고했고 우월한 해군력을 활용해 프랑스의 해안을 봉쇄하였다. 또한 영국은 지상군 전력으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스웨덴, 시칠리아와 나폴리 왕국을 끌어들였다. 일명 [[오스트리아 전쟁]],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의 시작이었다. 선전포고 소식을 접한 나폴레옹은 자신의 패권을 가로막는 마지막 방해물인 영국을 박살내기 위해 18만 명에 달하는 대군을 새로 편성하여 영불 해협과 접한 불로뉴 해안에 집결시켰다. 하지만 이들을 해협 건너편인 영국에 상륙시키는 것은 프랑스의 해안을 봉쇄하고 있는 영국 해군을 와해시키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봉쇄를 뚫고 영국 해군을 와해시킨다는 것은 프랑스의 해군력으로는 도저히 답이 안 나온다는 결론은 천재적 전략가인 나폴레옹 본인이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이집트 원정]] 당시 [[아부키르 만 해전]]의 패배를 경험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영국 해군을 전부 섬멸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군대를 상륙시키는 데 필요한 6시간을 포함해서 '''딱 24시간''' 동안의 영불 해협의 제해권이었다. 나폴레옹은 영불 해협을 방어하는 영국 해군을 섬멸하고 24시간 동안만 영불 해협의 제해권을 확보할 수 있으면 6시간 안에 18만 명의 지상군을 영국에 상륙시킬 수 있다고 계산했다. 상륙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지상전에서 그때까지 불패를 자랑하던 천재적인 전략가이자 전술가인 나폴레옹 본인의 몫이었으므로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는 문제가 없었다. 더군다나 이때는 이른바 나폴레옹의 전성기 시절이어서 후반기 보여주는 판단 착오나 실수는 거의 없었다.[* 허나, 이 말은 조금 잘못된 것이 나폴레옹이 대전략 차원에서 이베리아 반도 전쟁과 러시아 원정 등의 실수는 있었지만 그런 재앙 이후에 벌어진 나폴레옹의 몰락의 한 축인 1814년 독일 전역에서도 나폴레옹이 이끄는 본대와 붙은 연합군은 라이프치히 전투를 제외하면 모두 박살났다. 특히 드레스덴 전투는 이미 삼면으로 프랑스군을 몰아넣은, 아주 유리한 상황을 연합군이 만들었음에도 나폴레옹이 직접 나타나서 진두지휘를 시작하자 순식간에 본인들이 반대로 포위당하는 어이없는 상황이 만들어지는 끝에 결국 대패하여 물러났다. 패한 라이프치히 전투는 아예 나폴레옹 본대에게 싸울 기회를 주지말고 나폴레옹만 보면 무조건 후퇴를 거듭한 것에 더해 나폴레옹 휘하 원수들이 이끄는 부대만 집요하게 노려 패배시키는 전략을 사용하여 전역 후반 연합군과 프랑스군의 숫적 우위가 두 배 이상 차이가 나자 마침내 나폴레옹과 붙은 결전으로 그 불세출의 명장도 끊임없이 쏟아지는 연합군의 병력을 당해내지 못하고 쓰러진 전투다. 이런 패배 이후 벌어진 프랑스 본토 전투에서도 나폴레옹은 자신보다 훨씬 많은 숫자를 거느린 프로이센의 맹장 블뤼허의 군대를 상대로 6일 동안 4번의 전투를 벌여 무려 교환비가 1:5~6 에 가까운 사상자를 프로이센과 러시아 군에 안기는 엄청난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결국 파리의 이른 항복과 연합군의 물량 공세에 무릎을 꿇었지만.] 반면, 대불동맹군은 아직 나폴레옹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해답을 찾지 못하고 신나게 털리기만 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24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프랑스 해군의 임무였다. 나폴레옹은 해군 전력의 열세를 만회하려고 동맹국이 된 스페인 함대까지 끌어들인 후에 연합 해군으로 하여금 영불해협 근처의 영국 주력함대를 유인하여 영국 해군의 전력을 분산시킨 후, 영국 해군 함대가 분산된 이후에 프랑스 해군함대를 집결하여 영국 해협함대를 상대하며 영불해협에서 수송함대가 무사히 해협을 횡단할 시간을 벌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해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해군에 정확한 시간에 육군식으로 맞추는 요구를 했는데, [[범선]] 시대에 해군이 그런 정확한 타임테이블을 맞출 수는 없었으며 그렇게 하는 것은 가장 경험많고 능력이 뛰어난 영국 해군에게도 절대 불가능에 가까운 무리한 요구였다. 물론 수적으로 우세한 영국 함대를 분산시킨 후 각개 격파후에 시간을 끈다는 자체는 좋았지만 전열함이라는 전함들의 특성과 바다 기후의 특성을 간과한 것은 나폴레옹의 착각이었다. 게다가 이 작전은 시작하기도 전에 삐걱이기 시작했는데, 그나마 해전 경험이 많고 능력이 있었던 제독인 트레빌이 갑자기 사망한 것. 트레빌은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해 영국 해군을 격파한 적도 있고 나폴레옹의 명령으로 [[아이티]] 쪽에 프랑스군을 보내는 임무에서도 중추를 맡아 잘 수행하기도 하는 등 경험있던 제독이다. 무엇보다 항구에서 방어한 것이기는 해도 넬슨을 막아낸 적도 있었는데 1804년에 심장마비로 죽어버렸다.[* 물론 이 당시 영국과 프랑스 해군 선원의 숙련도 차가 너무 커서 트레빌이 맡았어도 이길 가능성은 높지 않았겠지만 나폴레옹 입장에서는 상당히 아쉬운 사망이었다.] 이 공백을 채워야 하는데 마땅한 사람이 없어 나폴레옹도 한참 고민했으며, 급기야 나폴레옹은 후보 3명을 비서에게 언급하며 누가 제일 나은지 묻는다. 비서는 패전이긴 해도 해전 경험이 있기는 했던 [[피에르 빌뇌브|빌뇌브]]를 선택했으며[* 3명중 1명은 나폴레옹의 신임을 못 받고 있었으며 빌뇌브를 제외한 나머지 1명인 로실리 제독은 정말 해전경험이 1도 없었다. 즉, 나폴레옹이 생각해도 빌뇌브보다 나은 선택지가 없었다는 것인데 그냥 물어본 것으로 보여진다.] 결국 빌뇌브가 툴롱 함대 및 연합함대의 사령관을 맡아 넬슨의 느슨한 포위망을 뚫고 출발하게 된다.[* 당시 넬슨은 일부러 느슨한 방어선을 짜서 적을 유인했다가 전면전으로 적을 섬멸하는 작전을 짰다. 그런데 포위망을 너무 느슨하게 했다가 오히려 빌뇌브가 탈출하게 된 것이다.] 그래도 빌뇌브가 이끄는 프랑스 함대는 무사히 카디스 항에 도착하여 그라비나 제독의 스페인 함대와 합류하였고, 1805년 4월에 서인도 제도를 습격하는 데 그럭저럭 성공했다. 지중해에 있던 [[호레이쇼 넬슨]]은 황급히 서인도 제도로 달려갔다. 그러나 빌뇌브 함대는 대서양을 가로질러 귀환하던 중 칼더 제독의 영국군 함대와 만나 교착에 빠졌다(피니스테리 곶 해전. 1805. 7. 22). 그리고 자신의 연합함대의 부족한 실력을 현실적으로 잘 알고 있어서 처음부터 자신없던 빌뇌브는 영불해협으로 항진하지 않고 카디스로 대피했다. 이 순간에 이미 나폴레옹의 영국 본토 진공계획은 무산되었다. [[파일:492px-Abbott,_Robert_Calder.jpg|width=400]] 로버트 칼더(Robert Calder) 제독. 그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그는 피니스터리 곶에서 빌뇌브의 연합함대를 격멸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아이러니하게도 칼더 제독은 넬슨과 인연이 있는데, [[세인트빈센트 곶 해전(1797)|세인트빈센트 곶 해전]]에서 넬슨이 존 저비스 제독의 명령에 항명하고 전공을 세우자 저비스 제독의 함대 부관이었던 그가 넬슨의 항명을 지적했으나, 저비스 제독이 오히려 괜찮다고 넬슨을 옹호한 적이 있다. 여하튼 칼더 제독은 피니스테리 곶 해전 이후 군법 회의에 회부되어 영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제독이 귀환하는 배가 프리깃함이어서는 안된다고 박박 우겨 넬슨에게서 전열함 1척[* '''98문 2급''' 전열함인 [[https://en.m.wikipedia.org/wiki/HMS_Prince_of_Wales_(1794)|보인급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Prince of Wales)]]. 피니스테리 곶 해전에서 칼더의 기함이었다. 전투를 앞두고 3급 전열함 한 척이 아쉬운 넬슨에게는 2급 전열함이 이딴 식으로 이탈하니 속이 까맣게 타들어가는 상황이었을 것이다.]을 얻어내 영국으로 돌아갔다. 빌뇌브의 함대가 카디스에 박혀 있던 사이 러시아군과 오스트리아군이 라인 강 방면으로 진격해오자 나폴레옹은 불로뉴에 주둔 중이던 영국 진공군을 라인 강 방면으로 돌렸다. 사실상 영국 진공을 포기한 것이었다. 나폴레옹은 영국 진공을 위해 단단히 훈련시켜 두었던 이 군대를 십분활용해 [[울름 전투|대륙에서 동맹군을 탈탈 털어버린 후]] 빌뇌브에게 [[이탈리아]] 공격을 위한 육군 수송을 지시하며 나폴리로 항해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는 넬슨의 함대가 유럽으로 돌아와 프랑스-스페인 주력함대를 격멸하기 위해 모든 준비를 마친 뒤였다. 애초에 단순히 겁쟁이라서가 아니라 정말로 자신의 함대 실력 수준을 잘 알았던 빌뇌브는 함대 수리 및 보급문제로 출항을 보류 중이었으나[* 이때 스페인과 프랑스 함장들을 모아 투표를 통해 출발을 보류하는 일도 있었다.] 여기에 크게 화가 난 나폴레옹 1세 황제가 자신의 후임으로 프랑수아 로실리 제독을 보낸다는 정보를 접하고 출항을 결정한다. 그런데 하필 이날은 카디스 항 앞바다의 바람이 약하고 파도가 높은 날이었다. 잠시후 서로 마주친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와 영국 함대는 교전에 들어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